본문 바로가기

Get Ready/미술사

한국미술사 4. 고려시대 회화

728x90

고려는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를 통해 불교를 국가적으로 장려함에 따라 다양한 불교미술품이 만들어졌다. 고려미술의 중심은 불화와 청자라 할 수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회화가 다양성을 띠며 발전했는데, 실용적 기능 뿐 아니라 여기와 감성의 대상이 되는 순수 회화도 발전하게 되었다. 화사를 관장했던 도화원과, 산수화, 인물화, 그리고 불교회화를 통해 고려회화를 알아보자.

 


 

고려시대에는 회사를 관장하는 도화원이 설치되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이녕 등 훌륭한 화원들이 배출되었고, 화원 외에도 왕공귀족, 승려 중 그림 그리는 이가 많았다. 그림의 소재도 인물, 초상, 산수, 영모, 화조, 묵죽, 묵매 등 다양해졌다. 

 

우선, 산수화부분에서 고려시대에는 우리나라 실재 경치를 대상 삼아 그리는 실경산수화가 태동하였다. 고려 최대의 거장 이녕의 <예성강도><천수사남문도>와 필자미상의 <금강산도><진양산수도><송도팔경도> 등이 이를 보여준다. 즉, 이녕이 활동하던 12세기 초엽에 고려의 산수화가 이미 토착화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외에도 어제비장전, 노영<지장보살도>에 그려진 배경산수, 이제현<기마도강도>, 공민왕<천산대렵도>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공민왕 수렵도에서는 박진감 넘치는 운동감과 표정이 뛰어나며, 이곽파화풍을 수용한 이제현의 북종화적 풀의 묘사로 돋보인다. 

 

이제현, <기마도강도>
공민왕, <천산대렵도>

 

 

인물화(초상화) 부분에서는 제왕, 공신, 기타 사대부들의 초상이 빈번히 제작되었는데, 특히, 제왕의 진영을 모시는 진전의 발달이 더욱 두드러졌다.  <안향의 초상화>가 대표적이다.

안향 초상(安珦 肖像)은 소수 박물관에 있는 고려 중기 문신인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의 초상화이다.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소수서원에 있는 이 초상화는 선생이 세상을 떠난지 12년 후인 고려 충숙왕 5년(1318)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후에 소수서원이 됨)을 건립하면서 이곳에 옮겨놓은 것이다. 선생의 초상화는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귀중한 작품이다.

 

<안향 초상(安珦 肖像)>, 37*29cm

 

 

고려시대에는 불교회화가 특히 발달했는데, 고려불화는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여 청자와 더불어 고려미술의 귀족적 아취를 잘 나타낸다. 고려시대 전형적 불교회화는 궁중과 밀접한 관계에서 이루어졌는데, 화공들도 우수 불화사들이었다. 안타깝게도 고려불화는 많은 작품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데, 혜허의 <수월관음도>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불화 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비단 바탕에 아름다운 채색을 써서 그려진 이 관음상은 물방울 모양의 광배가 독특한데, 유연하게 곡선진 몸매, 가늘고 긴 눈매, 작은 입, 부드러운 동작, 투명한 옷자락, 호화로운 장식, 섬섬옥수 가냘픈 버들가지 등 고려적 특색을 강하게 보여준다. 또한 서구방이 그린 <수월관음도>(1323)는 화려하면서도 속되지 않은 고귀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뛰어난 고려 불화 중 하나이다. 

 

혜허, <수월관음도>, 비단 바탕에 채색, 105*58cm, 프랑스 기메 국립동양박물관
서구방, <수월관음도>  고려 1323년, 비단바탕에 채색 165.5*101.5㎝. 일본 센오쿠학고간(泉屋博古館) 소장

 

 

고려시대는 전에 비해 회화의 목적과 소재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되었고, 고려불화는 고려청자와 함께 우리 민족의 역사상 유래없이 화려한 색채와 유연한 선으로 귀족적 아름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또한 산수화에 있어서는 북송 이곽파학풍, 남송원체화풍, 원대 고극공계 미법산수화풍 등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고 소화하여 실경산수화를 발전시켰고, 조선 진경산수화로의 발전의 토대를 이루었다. 

 

 

 

고려 실경산수화와 조선 진경산수화의 연관성

우리나라 자연경관과 지역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가 고려시대에는 실경산수로, 조선시대에는 진경산수로 각각 전개, 발전되었는데, 각각의 등장배경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고려 최고의 거장 이녕이 남긴 <예성강도>는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이녕이 인종2년 수행 화원으로 중국 북송에 갔다가 마지막 황제 휘종의 요청에 의해 그렸다고 전해진다. 서화가 뛰어났던 휘종이 매우 칭찬했음을 미루어 보건데, 그 수준은 매우 높았고, 당시 화원들의 원체화풍, 궁정취향과 연과지어 사실적인 청록산수화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실경산수전통은 조선 초기에도 이어져 새 왕조의 위상을 드높이고 사대부들의 풍조에 부합되어 확산되었으며 <금강산도>가 주종을 이룬 명승명소, 별서유거, 야외아집 등으로 확산되어 조선 중기에는 김시, 이경윤 등의 문인화가들이 그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여진다. 

 

진경산수화는 고려와 조선초, 중기 실경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18세기 유행한 남종화법의 영향을 받아 정선이 이룩한 한국적 화풍이다. 진경산수화는 조선후기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와도 연관되는데, 즉 우리 산천을 주자학적 자연관과 접목하고자 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 명승명소유람풍조가 그 배경이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감흥, 정취, 감동을 구현해냈다. 양식적으로 정선의 <금강전도>에서 보여지듯이 부감법의 시각, 동적인 대각선, 사선을 이용한 화면구성법, 날카로운 수직준, 부드러운 미점, 습윤한 피마준, 듬성한 태점, 짙은 적묵의 바위, 편필직필의 소나무, 안온한설채법 등의 한국적 특징을 구사해 냈다. 정선의 진경산후화풍은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유성, 김응환, 김석신 등 주로 문인화가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후기 진경산수화풍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통신사절단으로 도일했던 최북, 김유성에 의해 일본 에도시대 남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민화의 금강산도,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정선, <금강전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