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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 7. 조선 후기 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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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는 특히 두드러진 새로운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켰는데, 가장 한국적, 민족적 화풍이 이 시대를 풍미했다. 이는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과 시대적 배경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중국 남종 화풍이 유행했으며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탄생하였고, 서양 화법이 전해져 후기 회화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우선 조선 후기의 새로운 경향이 구체적 모습을 나타낸 것은 대략 숙종조 후반 1700년경 전후인데, 이 전환기에 활동한 윤두서 작품들이 일부 북종 화풍을 보여주면서도 산수화에서 남종화풍의 영향이 보이고, 또 풍속화의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참고가 된다. 그리고 이어 영정조 연간에 자아의식을 토대로 대두되었던 실학의 발전이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갖는데,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다룬 사실주의 회화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발전은 실학의 추이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o 첫번째 조류 : 절차화풍의 쇠퇴와 남종화의 본격적 유행

후기 회화의 첫번째 조류는 절차화풍의 쇠퇴와 남종화의 본격적인 유행이다. 실경이나 형사보다 사의를 추구했던 남종화법은 19세기 초엽부터 본격적으로 전해져 선비화가와 화원화가들이 보편적으로 이를 따랐다. 원말사대가, 명대오파, 청대정통파의 영향을 받은 남종화풍은 조선 회화가 종래 북종화적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어주었다. 남종화풍을 이끈 대표화가는 강세황, 이인상, 심사정, 신위였다. 

 

표암 강세황의 <벽오청서도>에서는 한쌍의 벽오동 밑 초가에 앉아 청소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더위를 식히는 선비를 그렸는데, 짜임새 있는 구성, 활달하면서 단아한 필묵법, 먹과 조화로운 담채의 적절한 사용 등 모든 것이 어울려 높은 경지의 작품을 이루고 있다. 여백이 많고 색채가 깔끔하고 시원한 것은 조선적 남종화의 모습이다. 능호관 이인상은 가장 깔끔한 남종화풍을 이룬 인물인데, <송하관폭도>에서는 특유의 굽어진 소나무, 간결한 구도, 편평하고 각진 바위, 담백한 느낌의 준찰 등 이인상만의 독자적 아취를 흠씬 풍긴다. 

 

강세황의 <벽오청서도>
이인상의 <송하관폭도>

 

 

o 두번째 조류 : 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는 고려와 조선초, 중기 실경 산수화의 전통을 토대로 18세기 유행한 남종화법의 영향을 받아 정선이 이룩한 한국적 화풍이다. 진경산수화는 앞서 언급한 후기 사회적 변동과 의식의 변모와도 연관되는데, 즉 우리산천을 주자학적 자연관과 접목하고자 했던 문인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 명승명소 유람풍조가 그 배경이다. 진경산수화는 단순한 재현이 아닌 회화적 재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감흥, 정취, 감동을 구현해 냈다. 

양식적으로 정선의 <금강전도>에서 보여지듯이 부감법의 시각, 동적인 대각선, 사선을 이용한 화면구성법, 날카로운 수직준, 부드러운 미점, 습윤한 피마준, 듬성한태점, 짙은 적묵의 바위, 편필직필의 소나무, 안온한 설채법 등의 한국적 특징을 구사해 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풍은 강희언, 최북, 김윤겸, 김유성, 김응환, 김석신 등 주로 문인화가, 화원들에게 파급되어 정선파 유파를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풍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통신사절단으로 도일했던 최북, 김유성에 의해 일본 에도시대 남화가들인 이케, 우라카미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민화의 금강산도, 관동팔경도의 양식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중국의 산수화가 다양한 기교로 멋을 추구하며 관념적이고 이상주의를 표현하는 관념산수화라면, 진경산수화는 중국을 벗어나 우리 현실적인 감정과 정서가 담긴 그림이다. 

 

정선 <금강전도>

 

o 세번째 조류 : 풍속화

풍속화는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 할 수 있다. 후기 조선인들의 실제 생활과 일상의 모습을 소재로 그렸다. 청나라를 통한 서양문물의 수용, 영정조 연간 취미의 변화, 서민생활의 융성과 발전에 따른 서민층의 회화소장 욕구와 같아 발전되었다. 

풍속화의 대가 김홍도는 <서당><씨름><빨래터><우물가><자리짜기><집짓기> 등에서와 같이 일반백성의 생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즐겨 다루고, 동글한 눈매의 소탈한 서민상을 창출했으며 투박하면서 강한 필선, 해학과 즐거움이 물씬 밴 정감 넘치는 삶의 분위기를 생생히 묘사했다. 그의 풍속화풍은 김득신<파적도>와 신윤복<탄금><미인도>를 비롯 민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김홍도 <씨름>
김득신 <파적도>

 

 

o 네번째 조류 :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의 일부 수용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이 일부 수용되어 김두량, 이희영, 박제가 등 화원들의 의궤도와 민화의 책쪽이 그림, 김두량<흑구도><월하산수도><목동의 낮잠> 등에서도 명암법과 음영법, 투시도법 등이 보여진다. 이러한 수용이 19세기 이색화풍의 형성을 가능케 했다고 믿어진다. 하늘을 파랗게 그리고 초상화에 한쪽뺨을 어둡게 하여 입체감을 나타내는 것, 변상벽의 고양이 그림에서의 털의 묘사, 김홍도와 강세황의 <송하맹호도>에서의 호랑이 터럭과 무늬 증에서 서양화법의 수용을 보여준다. 

김홍도 <송하맹호도> 부분

 

이처럼 조선후기에는 남종화풍의 본격적인 유행과 뚜렷한 한국적 화풍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크게 유행했고, 서양화법이 수용되는 등 초중기와는 다른 경향들이 대두되었다. 후기에는 명청대 회화를 소화하면서 보다 뚜렷한 한국적, 민족적 자아의식을 발현했던 시기라 볼 수 있다.

 

 

 

주요작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 후기 화단을 이끌었던 표암 강세황은 대표적인 문인화가이다. 

강세황 <송도기행첩>

 

김홍도(金弘道 1745~?)

강세황으로부터 글과 그림을 수업받아 풍속화의 대가를 이룬 인물이다. 강세황이 안산 칩거시절에 약 7세부터 20세까지 강세황에서 그림을 배운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풍속화가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는 화가로 성장했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풍속화를 "우리나라 400년 동안에 파천황적 솜씨"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겸재 정선(鄭歚, 1676~1759)과 관아재 조영석(趙榮祏, 1686~1761)

관아재 조영석은 겸재 정선과 더불어 양반신분이었으나 정선은 유복한 가정이었던 반면 정선은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다. 정선은 산수화로 조영석은 인물와, 풍속화에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정선은 일찍이 그 예술적 기량을 인정받아 안동 김씨의 후원을 받았으며 그 도움으로 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남종화풍을 수용하여 한국의 실제 존재하는 실경에 기반을 둔 진경산수화풍을 이룩했다. 즉 실경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회화적 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감흥, 정취, 감동을 구현하여 한국적 화풍을 이루었다. 

 

 

 

공재 윤두서( 尹斗緖, 1668~1715)

사실주의 회화의 선구자로 <자화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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