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기술을 만난 예술
로봇이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감정이 없기에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으로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최근 국립극단 무대에 올랐던 정진새 작가의 연극 ‘액트리스원’ ‘액트리스투’도 그런 가능성을 전제로 했다. 인간보다 연기를 잘하게 된 AI 로봇이 디지털 세상에서 망해가는 연극판을 지탱한다. 하지만 인간의 질투와 방해로 로봇 배우는 물론 연극도 사라지게 되고, 인류를 비추는 거울인 연극이 사라지자 인류도 멸망할 지경에 이른다.
AI 기술을 적용한 ‘메타휴먼’이 등장하는 연극도 나온다. 6월 고양아람누리에서 공연되는 연극 ‘A, 아이’는 연극이 사라진 시대에 연극의 흔적을 좇는다는 내용이다. 고양문화재단이 국내 최초로 기획한 ‘디지털 씨어터’ 공모사업 선정작 중 하나로, 영화 ‘승리호’의 CG에 사용된 에픽게임즈의 게임 엔진 ‘언리얼엔진’의 첨단기술을 동원해 제작 중이다. 프로젝션 매핑 기술로 조성된 가상의 공간에서, 모션캡처로 3D 아바타를 만드는 메타휴먼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휴먼과 실제 배우가 만나는 컨셉트다.
무대 위에도 3D 아바타 등장
4차 산업혁명 시대,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의 대명사인 공연계까지 침투하고 있다. 지난 1월 공연된 프로젝트 밈의 SF스릴러 연극 ‘너를 만난다’는 고주파 레이저 파사드와 프로젝션 매핑 기술로 레이저 감옥 같은 실감 나는 ‘가상의 밀실’을 만들어내 주목받았다. 인간인 척하는 ‘안드로이드’와 감별사 ‘세퍼레이터’의 심리 게임으로, 배심원이 된 관객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안드로이드 색출에 힘을 보태야 했다. 이 작품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아트앤테크 창작활성화 사업’ 선정작이다.
또 다른 선정작인 이정연 댄스프로젝트의 ‘루시드 드림 II’도 가상의 공간에서 펼쳐진 공연이었다. 감각과 욕망까지 조절 가능한 신인류의 사랑 이야기를 영상기술과 현대무용의 융복합 퍼포먼스로 펼쳐냈는데, EEG 센서를 사용해 확보된 퍼포머의 의식 데이터가 증강현실(AR) 라이브 중계 기술로 시각화되고, 관객이 움직이며 상호작용한 결과가 프로젝션 매핑 기술을 통해 나타나 몰입형 AR 공간의 일부가 됐다.
팬데믹 이후 디지털 전환이 사회적 화두가 되자 예술위원회는 올해 이 사업을 ‘예술과 기술 융합 지원사업’으로 변경하고 규모를 대폭 확대했다. 21억여원으로 13개 작품을 지원했던 지난해에 비해 올해는 47억여원을 들여 85개 프로젝트를 지원한다. 2월 말 개최한 ‘예술과 기술 융합주간’ 온라인 행사는 전문적인 주제임에도 1000명이 넘게 참여를 신청하고, 유튜브 조회 수 12만회를 넘기며 높은 관심을 입증했다.
해외에서는 이미 영화 ‘아바타’ 뺨치는 테크놀로지가 무대에 구현되고 있다. 영국 로열셰익스피어컴퍼니(RSC)는 2016년 인텔과 협업해 세계 최초의 라이브 디지털 연극 ‘템페스트’를 선보였는데, AR 모션캡처 기술로 3D 괴물이 관객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듯한 장면이 화제였다. RSC는 비대면 시대에 기술을 이용한 대안적 공연 문법까지 제시했다. 지난 3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온라인 공연으로 재창조한 ‘드림(Dream)’은 공연의 대체 불가능한 미학인 ‘라이브’에 포커싱해 게임 엔진으로 실시간 반응하는 디지털 아바타를 만들었다. 모션캡처 수트를 입은 배우들이 사방 7m 규모의 스튜디오에서 연기를 하면 온라인상에는 가상의 숲속 요정들로 디지털 전환되어 나타나고, 관객도 일정 요금을 내면 반딧불이 되어 극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기술을 이용한 표현의 확장은 대부분 닫힌 작품을 넘어 열린 텍스트를 향한다. 퍼포머와 관객의 ‘인터랙션’에서 고유의 미학을 찾는다는 얘기다. 최종 생산물이 작품에 저장된 춤이나 연기가 아니라 관객과 미디어의 인터랙션이 되기에, 기술을 통해 얼마나 생생한 상호작용적 장치를 창조하는가가 관건이 된다. 미디어아트 전문가인 김이경 전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최근 관심을 끈 ‘레인룸’ ‘빛의 벙커’전처럼 기술을 통해 관객에게 총체적 몰입감을 주는 확장된 예술 경험의 제공이 전통적인 전시나 공연을 대체하고 있다”면서 “자기 정체성과 주권에 관한 표현이 강해진 시대 흐름과 MZ세대의 높은 디지털 리터러시가 맞물려 예술도 몰입형으로 가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술+예술+참여=새로운 예술
기술이 배경을 넘어 예술양식의 핵심적 요소로 부상하면서 예술이 기술에 묻혀버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나온다. 디지털씨어터 사업을 기획한 정재왈 고양문화재단 대표는 “4차 산업혁명에 순수예술도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면서 “예술가들도 기술에 대한 강박을 수용, 체화해야 발전이 있다. 예술과 기술이 선순환 구조로 윈윈하려면 저작권 보호 등 정책적 보완도 필요하지만, 판을 키우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안호상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도 “기술의 도입은 경제적 이득이 되니 극장의 물리적 조건과 공연의 형식은 급속도로 변화될 것”이라면서 “BTS가 게임 플랫폼에서 활동하듯 장르 간 융합과 통섭을 통해 장벽이 무너지고 또 다른 예술이 탄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관객이 예술에 바라는 것은 사람냄새 나는 감성적인 체험일 터. 기술과 융합된 공연에 인간성 자체에 대한 질문이 자주 보이는 것도 기술 사회라는 현실에서 인간이 소외되기 쉽기 때문이다. 정재왈 대표는 “기술을 앞세운 공연에 가장 중요한 건 인간적인 서사다. 노벨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읽으며 로봇에 감정이입되는 것이 작가가 구축한 서사의 힘 덕분이듯, 공연에서도 좋은 서사가 진화의 기본 조건”이라고 말했다. 김이경 교수도 “기술의 사용은 예술의 도구화에 대한 위험을 항상 지니지만, 디지털 시대에도 예술의 궁극적 가치는 기술을 통해 변화하는 삶의 본질을 성찰하고 새로운 문화양식을 표현하는 데 있다”면서 “기술도 결국 예술의 창작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고, 이는 예술가들의 창조적 능력과 관객의 참여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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