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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Ready/미술사

서양미술사 18. 바우하우스(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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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틀리헤스 바우하우스(Sttatliches Bauhaus) 혹은 줄여서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서 1933년까지 독일에서 설립 및 운영된 학교로,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였다.

독일어로 '건축의 집'을 의미하는 바우하우스는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바이마르에서 설립했다가, 1925년 데사우로 옮겼고, 이후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로 폐쇄되었다. 바우하우스 양식은 현대식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어지는 예술, 건축, 그래픽 디자인, 실내 디자인, 공업 디자인, 타이포그래피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교육이념

바우하우스 교육의 최종 목표는 건축을 중심으로 각기 분산된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는데 있었다. 이와 동시에 “건축가와 조각가, 화가, 우리 모두는 공예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로피우스의 주장대로 공예와 순수미술의 결합을 추구하는 것이 창립 당시의 목표였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학교 내외의 복잡한 상황과 갈등 속에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데, 교육이념의 문제점과 변화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기의 바우하우스에는 건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전쟁 후의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 있었다. 바우하우스는 공간과 재료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에 처했고, 따라서 특별한 시설이 요구되지 않는 이론과목에 집중했다. 따라서 그로피우스가 가장 중요시하던 건축 교육은 1927년에야 비로소 실행되었다.

 

 

건축이념

바우하우스의 건축이념과 구성 원리는 크게 네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로 협동작업의 개념으로 조각가, 화가, 건축가 사이의 예술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협력과 설계자인 건축가, 시공자, 기술자와의 수평적인 협력체제로서 서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두 번째로 형태의 문제를 거부하고 시각적 순수성의 정확한 재료 및 구조 기술에 의해 결정 되어야 한다. 내면적인 생명력의 근원은 그 시대의 구조 기술이며 기술의 참된 실현이 건축의 초월된 의미로 확장될 때 건축은 그 시대의 역사로서 내적구조의 결정체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시대정신이 요구되는 프로그램의 정확한 이해와 경제성을 통하여 건축문제의 해결이 가능하였고 이러한 경제성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재료 및 모든 부재의 규격화, 표준화로 연결되며 공업생산 된 부재는 협동 작업에 의한 현장조립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간 개념에 관한 것으로 개별적인 특성과 목적에 의한 ‘합목적성’개념과 시각적인 다양성에 의한 ‘시·공간’개념을 들 수 있다. 전자의 개념은 기능주의적 공간 구성과 공간의 정의, 그리고 목적에 맞는 공간의 부피와 크기에 의해 나타나고 후자의 개념은 형태들의 상호관입과 시점의 다양성에 의해서 표현된다. 형태의 상호관입은 고전적인 건축법칙을 부정하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디자인이념

바우하우스는 실용성에 대한 목표는 있었지만 일관된 디자인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육을 담당하던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디자인관에 따라 다양한 예술적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또 정치적 이유로 세 번에 걸쳐 지역을 옮기면서 외부적 영향도 받았기 때문이다.

1기(1919-1924)는 수공예를 강조하였으며, 자연과 재료에 대한 연구에 힘썼다. 2기(1925-1931)는 실생활 제품에서 공간까지 디자인을 확대하였고, 디자인의 기능성과 공공적 구조주의를 지향했다. 이는 사회주의적 디자인으로 발달하게 된다. 3기(1932-1933)는 표현주의적 예술을 추구하였으며,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도록 가르쳤다.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표준을 만드는 것에 전념했다. 바우하우스에 있어서 표준형의 의미는 만들기 쉬운 공장생산품의 의미가 아니라 문명사회에 있어서 최고수준의 원형을 의미하며, 우수한 품질을 가지며 본질적인 것이었으며 예술을 산업제품이라는 현실과 잇고자 하는 점에서 예술과 수공업, 산업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였다. 바우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이상적인 용도에 알맞다는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제품형태를 위한 탐구과정에서 오늘날 기능주의의 고전이라 불리는 불멸의 디자인들을 탄생시켰다.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Adolph Gerog Gropius, 1883~1969)

아버지, 큰아버지도 모두 건축가인 집안에서 태어난 그로피우스는1907년 그로피우스는 실용주의 학파의 최초 구성원 중 하나이었던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이 당시 그의 직장 동료 중에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다트리히 막스(Dietrich Marcks)등이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쟁쟁)

 

바우하우스 초대 학장 발터 그로피우스의 데뷔작인 파구스 공장은 모더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이 공장 건축은 그로피우스의 스승 페터 베렌스가 즐겨 사용하던 고전주의적 경향과 석재를 피하고 대신 강철과 콘크리트 구조로 기능성과 수직성을 강조했다. 커튼월 공법을 사용하여 과감한 유리의 사용으로 개방성을 높이고 공장의 무거운 분위기를 탈피시키는 데 일조했다. 공장의 컬러와 그래픽, 실내 비품까지 모두 하나의 작품으로 간주했다. 특히 공장 건물에 부착된 산세리프 글씨는 곧 도래할 모더니즘의 전성시대를 예고하는 듯했다.

 

그로피우스의 초기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파구스 제화공장, 뒷편, 1913
파구스 공장 내부, 출처: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Unesco World Heritage

 

 

 

 

그로피우스는 1919년 교장으로서 독일의 바이마르(Weimar)에 바우하우스(Bauhaus)를 창립하게 된다. "짓다"라는 뜻의 "바우(Bau)"와 "집"이라는 "하우스(Haus)"의 합성어인 바우하우스는 건축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창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바우하우스에는 건축과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든 예술의 결합이 건축이다"라는 발상에서 각 예술적 요소들을 통달한다면 자연적으로 건축적 능력이 오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를 창립하며 교수들을 초빙하고 선언문을 작성하였다. 당시 표현주의적 활동을 많이 하던 그로피우스가 초빙한 교수진과 그가 작성한 바우하우스의 선언문은 표현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에서의 교육 또한 개인적 감각과 영감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앙리 반 데 벨데가 설계하고 건축한 바이마르 미술학교 교사. 1919년 이후 바이마르 바우하우스의 본관으로 사용되며, 현재는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대학의 본관이다. 출처: 중앙시사매거진

 

 

 

신입생을 모집하기 위해 배포되었던 4쪽짜리 팸플릿에는 바우하우스의 목적과 원칙이 소개되어 있다. 이어서 교육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팸플릿의 세 번째 페이지에는 라이오넬 파이닝거의 판화가 실려 있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이 확정되자, 그로피우스는 제일 먼저 파이닝거를 만나 도움을 요청한다. 그로피우스와 파이닝거는 불과 몇 개월 전인 ‘11월그룹’ 설립 당시 처음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파이닝거는 그를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파이닝거는 그로피우스에게 아주 훌륭한 조력자였다. 이미 이전에 여러 해 동안 바이마르에 산 적이 있던 그는 바이마르 지역의 많은 예술가와 개인적 인연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목적

바우하우스는 모든 예술적 창조성을 통합하도록 노력한다. 모든 예술분야의 교육(조각, 회화, 공예, 수공업)을 통합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요소로 이루어진 새로운 건축예술로 재통합하도록 한다. 비록 오래 걸리겠지만, 바우하우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념적 예술과 장식적 예술의 구분이 사라지는 모든 예술작업의 통합이라는 커다란 구조다.

바우하우스는 모든 건축가, 화가, 조각가를 능력 있는 공예가나 독립적인 창조적 예술가가 되도록 각자의 능력에 맞춰 교육할 것이다. 아울러 앞서 나가며 가능성 있는 공예가들의 단체 또한 만들 것이다. 동일한 정신에 기초한 이 공예가들은 건축물을 구조, 완성, 장식, 가구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디자인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원칙

예술은 모든 방법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공예는 가르칠 수 있다. 건축가, 화가, 그리고 조각가는 어원을 따져보면 모두 공예가다. 따라서 모든 예술적 창조의 필수불가결한 기초가 되는 철저한 공예 교육은 작업장, 또는 실습장이나 일터의 모든 학생에게 요구된다. 우리의 작업장은 차츰 완성될 것이고, 외부 작업장과의 위탁교육 계약은 곧 체결될 것이다.

학교는 작업장의 심부름꾼이며, 언젠가는 작업장의 일부가 될 것이다. 따라서 바우하우스에는 선생이나 학생은 없다. 마이스터(Meister), 장인, 그리고 도제만이 있을 뿐이다.

 

교육방법은 작업장의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수공업적 능력에 따른 유기적 학습형태가 개발되고,

˙ 모든 경직된 방식은 제거될 것이다; 창의성의 강조; 개성의 자유, 그러나 엄격한 학습

˙ 바우하우스 마이스터 평의회 혹은 외부 마이스터 앞에서 조합규칙에 따라 실시되는 마이스터 및 장인 자격시험

˙ 마이스터 작업에 학생들의 동참

˙ 학생들에게 작업주문이 들어오도록 중개

˙ 공공건물이나 종교건물과 같은 다양한 유토피아적 건축계획을 긴 안목을 가지고 공동설계. 이 계획과 관련하여 모든 마이스터와 학생들의 공동작업(건축가, 화가, 조각가)은 건축에 포함된 모든 요소와 부분이 점차 조화를 이루도록 함.

˙국내의 공예와 산업을 이끄는 지도자들과의 지속적 접촉 전람회, 혹은 여러 가지 모임을 통한 공공생활과 대중들과의 접촉

˙문제해결을 위해 건축학의 범위 내에서 사진이나 조각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전시회의 본질을 바꾸는 새로운 시도 작업 이외에도 연극, 강연, 시문학, 음악, 가장무도회를 통해 마이스터와 학생들 간의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도록 배려. 이 같은 모임이 즐거운 의식(儀式)이 되도록 계획

 

 

파이닝거의 판화와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선언문

 

 

파이닝거는 그로피우스의 팸플릿에 들어갈 판화에 그로피우스의 철학을 그대로 담았다. 고딕성당과 별들이 그려진 판화로 모든 예술을 건축의 날개 아래 통합하자는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 이념은 파이닝거의 판화에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다. 가운데 고딕형의 큰 성당은 건축이며, 그 아래 작은 집들은 기타 예술분야다. 하늘에 빛나는 세 별은 조각가, 화가, 건축가이다. 그로피우스는 팸플릿의 마지막 페이지에 자신의 철학을 선언문의 형식으로 보다 자세히 써넣는다.

“모든 조형적 행위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다. 한때는 건축을 장식하는 것이 미술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미술은 보다 큰 건축 예술의 필수요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은 스스로 만족하는 상태에 있다. 모든 공예가의 의도적인 공동 작업을 통해서만 이 같은 고립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체로 보나 부분으로 보나 건축이 여러 가지 요인의 종합적 형태임을 건축가, 화가, 조각가는 다시 인식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미술작품은 살롱미술로 전락할 때 상실했던 건축학적 정신을 다시 찾게 된다.

 

낡은 예술학교는 이러한 통일을 이뤄내려고 하지 않았다. 또한 이뤄낼 수도 없었다. 예술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학교는 다시 작업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스케치하고 그리기만 하는 무늬도안가와 예술공예가들의 세계는 이제 다시 건설하는 세계로 바뀌어야만 한다. 만약 한 청년이 조형적 행위에 대한 열정을 느끼고 옛날처럼 수공업를 배우기 시작한다면 불완전한 예술훈련 때문에 비생산적인 ‘예술가’라고 비난받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의 기술은 이제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는 수공예에 남아 있게 되는 까닭이다.

 

건축가, 조각가, 화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수공업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직업으로서의 예술은 없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공예가의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고급스런 공예가다. 예술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무의식 중에, 하늘의 은총이 그의 수작업으로부터 찰나의 순간에 예술을 꽃피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가에게 공예적 기초는 필수적이다. 그곳에 창조적 구성 능력의 원천이 있다.

 

공예가와 예술가 사이에 교만한 장벽을 세우고자 했던 계급차별의 오만함을 제거한 수공예가들의 새로운 조합을 세우자! 먼 훗날 새로운 신앙의 빛나는 상징으로 수백만의 수공업자의 손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갈 형태(Gestalt) 그리고 건축과 조각과 회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형태가 되는 새로운 미래의 건설을 우리 모두 함께 희망하고, 상상하고, 이뤄내자.”

 

 

 

 

그로피우스는 1925년 독일의 데사우(Dessau)에 바우하우스 빌딩(Bauhaus Building)을 설계한다. 바이마르에 있던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시대적 배경에 있다. 바우하우스 빌딩에는 커튼월이 사용되었고 러시아 구성주의자인 엘 리시츠키(El Lissitzky)의 폰트를 따왔다. 또한 평면적으로는 그로피우스의 이전 작품인 '파구스 공장'을 늘려놓은 느낌을 주며 건축 평면이 전체를 나누는 방식이 아닌 중심에서 뻗어 나갈 수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제시한다. 기둥과 벽이 분리되어 자유로운 입면 구성이 가능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발터 그로피우스,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1925~26, 출처: 위키피디아

 

 

함께 보면 좋을 영화

토마스 틸쉬(Thomas Tielsch)와 닐스 볼브링커(Niels Bolbrinker)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바우하우스>는 예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바우하우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사람 중심의 디자인을 추구한 바우하우스의 철학이 어떤 식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현대 예술가들의 활약을 통해 살펴본다. 바우하우스의 교수진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파울 클레(Paul Klee)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이었다. 그들은 예술과 기술이 조화를 이룬 세상을 추구하며 학생들을 양성했다.

 

영화 <바우하우스>는 폐교 이후 세계로 뻗어 나간 바우하우스의 영향력이 현재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덴마크의 공간 디자이너 로잔 보쉬(Rosan Bosch)는 아이들의 창의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공간을 설계했고, 알프레도 브릴렘버그(Alfredo Brillembourg)와 후베르트 클룸프너(Hubert Klumpner)가 공동 창립한 스위스의 디자인 그룹 어반 싱크 탱크(Urban-Think Tank)는 남미의 슬럼가에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기반 시설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건축가 반 보 레-멘첼(Van Bo Le-Mentzel)은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도 원한다면 도시에서 살 수 있도록 미니하우스를 선보였다. 영화에서 건축가 알프레도 브릴렘버그는 “21세기에는 도시 설계와 디자인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바우하우스가 추구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디자인’이 지금 어떻게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말이다.

 

 

 

 

※작성참고자료

˙그로피우스와 ‘바우하우스’ “세상의 모든 건축은 예술이다” (김정운, 중앙시사매거진, 2016.6)

˙일상에 기여하는 예술, 바우하우스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영화와 전시(인디포스트, 2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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