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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Ready/미술사

한국미술사 3. 통일신라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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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수용했으며, 당나라의 문화도 수용하여 문화 수준의 향상을 이룩했다. 삼국의 문화가 통합되고 조화되었을 것으로 믿어지나 화적이 전해지지 않아 단편적인 기록으로 추측해 볼 때,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미술은 화려하고, 원숙하며, 국제적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신라말기 화사를 관여하는 채전이 만들어졌고, 솔거, 정화, 홍계, 김충 등 유능한 화가들이 활약했으며, 당과의 교섭으로 국정 취미의 인물화, 청록산수화, 불교회화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대표적 인물인 솔거는 황룡사에 노송도, 분황사에 관음보살상, 진주 단속사에 유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적, 기운생동의 채색화로 추정된다. 정화와 홍계는 보살상을 주로 그렸고, 김충의는 여기화가였다.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었기 때문에 사찰과 불상들이 대거 제작되어 석굴암, 불국사 등이 탄생되었다.

 

불교회화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745-755)에서 보여지는 불보살의 유연자태, 균형몸매, 곡선, 정확한 묘사, 호화롭고 미려한 분위기를 통해 8세기 불교회화가 불상과 마찬가지로 매우 높은 수준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 754-755

<대방광불화엄경 변상도>는 삼성미술관 Leeum 소장품으로 통일신라(統~新羅, 754~755) 때 만들어진 이다. 황통사의 승려인 연기법사(緣起法師)가 발원 하여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사경변상도의 초기 모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고급 종이인 자색 조이의 표지에는 연꽃과 당초 무늬로 신중들이 그려지고, 변상도로 추정되는 부분에는 전각과 보살상이 그려졌다. 특히 사경변상도에 보이는 불·보살의 살찐 듯한 얼굴과 역동적인 선묘는 당나라의 영향이 엿보여 당시 국제교류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사경(寫經)은 불교 경전을 손으로 베껴 쓰는 행위 또는 베껴 쓴 경전을 말하며, 경전을 유포하거나 불자가 공덕을 쌓고 부처의 마음을 내면화하기 위한 수행의 한 수단으로 제작되었다. 

 

사경의 제작은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는 신성한 신앙행위로 그 제작 과정에서 엄격한 절차와 의식을 따랐다. 사경의 제작과정 및 의식 에 대해서는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대방광불화엄경 大方廣佛華嚴經>(754~755)의 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하여 닥나무를 키울 때 부터 뿌리에 향수를 뿌리고, 제작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보살계를 받아야 했으며,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대소변을 보거나 자고 일어난 후, 식사 후에 반드시 향수로 목요을 해야 했다. 사경을 할 때는 향을 피우고 한글자씩 쓸때마다 부처와 보살에게 절을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글씨를 썼다. 마지막으로 두루마리로 된 경전의 측 끝 부분인 경심(經心) 안에 한 알의 사리를 넣어 완성하였다. 

 

통일신라의 미술은 삼국시대의 고졸함을 벗어나 삼국의 문화와 당서역의 문화를 소화하여 국제적이며, 세련되고 풍요로웠으며, 사실적 기법과 이상적인 미의 세계가 구현되었다. 무르익은 기교와 이상적 조화의 미를 창조하려 했던 것이 통일신라 미술의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주요작가

솔거 (率居, ? ~ ?)

솔거는 신라 때의 화가로, 삼국사기에 열전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솔거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그 조상을 알 수 없다. 선천적으로 그림에 뛰어났으며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老松)이 실물과 같아 새들이 날아들었다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일화에 의하면 훗날 황룡사의 벽에 그려져 있던 노송도의 색이 바래지자 한승려가 노송도를 색을 다시 칠했고 새들이 오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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