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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직접 가 보니

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 툴루즈 로트렉 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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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랭 루즈의 작은 거인으로도 불렸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의 앵콜 전시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진행되었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로 인해 다음 순회전시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 플로리다 전시가 취소되고, 원작 소장지 그리스 아테네의 헤라클레이돈 미술관(Herakleidon Museum)으로 반출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의 재개관 제안을 받아 진행하였다. 

이번 전시회는 2007년부터 그리스, 미국, 이탈리아 등지를 거쳐 순회 전시 중이며, 서울 전시회는 14번째 전시이다.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 드로잉, 판화, 스케치 등 150여점의 진품 작품, 디지털 미디어 아트로 재현한 8점의 작품들, 사진, 책, 잡지, 음반 표지 등의 아카이브와 작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여주는 영상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은 1864년 남프랑스의 알비(Albi)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렉 몽파"이며 그의 이름이 긴 이유는 로트렉 가문이 12세기부터 이어진 귀족 가문이기 때문이다. 로트렉은 가문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이어온 근친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날때부터 병약하고 성장이 느렸다고 한다. 또한 청소년기에 두 차례의 다리 골절 사고로 다리의 성장이 멈추면서 성인이 되어서도 키가 150cm를 넘지 않았고, 평생 지팡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귀족의 전형적인 취미 활동이었던 승마, 사냥을 즐길 수 없었던 대신, 타고난 예술적 재능으로 그림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따. 특히 인물 표현에 소질을  보였던 그는 9살 때부터 가족, 하인, 사냥 장면 등 주변 인물을 관찰하고 연필, 초크, 물감, 잉크 등 다양한 재료로 데생을 그렸다. 

 

1871년 독일과의 전쟁이 끝나고 프랑스가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벨 에포크(Belle Epoque)시대를 맞이했고, 파리에서는 사업과 예술과 문화가 번창했다. 다양한 서양 미술 사조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탄생하여 꽃을 피웠고, 클로드 모제, 오귀스트 르누아르,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 드가, 폴 세잔, 반 고흐, 폴 고갱, 오귀스트 로댕 등 인상주의 화가를 중심으로 모던 아트의 대가들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펼쳤다. 작가들의 예술 표현이 자유로워졌고, 석판화나 사진 등 대량 생산의 예술품 제작 방식이 개발되었으며, 대중이 예술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또한 거리에 포스터 부착 제한 법률이 완화되면서 광고 포스터가 파리 시내에 넘쳐났다. 

 

로트렉은 1882년 18세가 되던 해에 귀족 가문을 떠나서 몽마르트에 정착했다. 1889년, 오픈한 카마레 물랭 루즈(Moulin Rouge)는 그의 작품 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랭 루즈는 프랑스어로 "붉은 풍차"를 의미하는데, 파리의 몽마르트 지역은 원래 밭과 풍차가 많은 파리 외곽의 시골 마을이었다고 한다.  이 곳에는 빈민층, 예술가들이 많이 살았는데, 후에 이 지역이 유흥가로 변하면서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물랭루즈는 오픈하자마자 파리의 명소가 되었고 유명 인사들이 드나드는 최고의 사교장이 되었다. 전시의 시작은 이렇게 화려했던 19세기 말 파리 몽마르트 거리와 물랭루즈를 재현한 공간으로 시작된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영상과 파리 전경을 표현한 조형물로 마치 19세기 파리로 여행한 느낌이 든다. 

 

 

로트렉은 물랭 루즈에 지정석을 두고 매일 밤 드나들면서, 이 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과장이나 미화시키지 않고 그려냈다. 대서, 희극배우, 서커스 광대, 매춘부 등 비주류 인물들을 모델로 하여 선입견이나 편견 없이 사람 자체를 그리는 것에 주력했다. 그들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으며, 술집 손님들의 허식과 무지를 풍자하기도 했다. 이러한 화풍은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로트렉, <물랭루즈,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 1891

 

1891년, 로트렉의 첫 포스터 작품 <물랭루즈,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는 그를 파리의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물랭루즈의 가을 시즌 오픈을 위해 제작한 이 포스터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파격적인 디자인으로 이슈가 되었다. 사람 키 만한 사이즈, 간결한 디자인, 대담한 색채 등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포스터 였으며, 파리 곳곳에 붙은 포스터를 시민들이 떼어가기 위한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포스터는 상업적인 광고 포스터를 예술작품으로 끌어 올리며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이 포스터를 시작으로 석판화 기법을 이용한 포스터와 판화들이 탄생하는 등 로트렉은 현대 광고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며 현대 포스터의 아버지라 불리우게 되었다. 한편, 로트렉은 포스터의 인물을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생각으로 그림 상단에 큰 글씨로 인물의 이름을 적었고, 이 포스터의 주인공 라 굴뤼는 최고의 댄서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가 그려낸 포스터들은 모델로 등장한 제인 아브릴, 이베트 길베르, 아리스티드 브뤼앙까지 유명인사로 만들었다. 로트렉의 영원한 뮤즈이자 친구이며 물랭 루즈의 스타인 제인 아브릴(Jane Avril, 1864~1943)은 보통 댄서들과 다르게 미술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지적인 여자였다. 라 굴뤼가 일탈과 생동감의 상징이라면, 제인 아브릴은 귀부인 같은 품위를 추구했다. 

 

제인 아브릴 실사와 로트렉의 작품 속 제인 아브릴

 

 

아리스티드 브뤼앙(1851~1925)은 로트렉의 열렬한 팬이자 친구인 샹송가수이다. 가수이자 작곡가였던 그는 자신을 홍보하는데 로트렉의 포스터만 사용했다. 브뤼앙이 카바레 주인에게 공연 포스터를 로트렉에게 맡기자고 제안했던 작품으로 브뤼앙이 즐겨입는 검정색 모자와 망토, 붉은색 스카프를 묘사했다. 

로트렉이 처음 시도한 브뤼앙의 뒤로 글자의 일부 이미지가 뒤로 숨겨져 있는 기법은 현재까지도 많이 쓰여지고 있다. 

 

<엠베서더 카바레의 아리스티르 브뤼앙(Ambassadeurs Aristide Bruant in his cabaret)>, 1892

 

 

로트렉은 대중적인 인기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와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그는 한편으로 불규칙한 생활, 과음, 직업여성들과의 무분별한 교제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었고, 1899년에는 알코올 중독과 정신착란 증상이 심해져서 몇 달간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퇴원 후 작품 활동으로 지속하기는 했으나 정신력과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1901년 36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유화, 수채화, 판화와 포스터, 드로잉 등 5천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전시소개

전  시  명  툴루즈 로트렉展 - Henri de Toulouse-Lautrec -

전시기간  2020.06.06 ~ 2020.09.13 *종료*

관람시간  10am ~ 7pm (매표 및 입장마감 오후 6시, 매주 월요일 휴관)

전시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제1,2전시실

입  장  료  성인 : 15,000원

관람연령  전체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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