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뮤지엄에서 열린 바스키아 전시는 코로나 시국 속에서도 약 20여만명이 관람한 블록버스터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바스키아의 대표적 컬렉터인 뉴욕의 아트딜러 호세 무그라비의 소장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 다른 대표적인 컬렉터는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다.)
앞으로 10년이내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라 말하는 이번 전시의 작품 보험가액만 1조원, 전시장 보험료는 5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전시 내용, 텍스트, 도록 동의까지 전시를 위한 소장자, 저작권사, 재단과의 협의를 거쳐야 했고, 작품의 원형을 보존하기 위한 과정 등 비용면에서도 전시 진행에 있어서도 꽤 까다로웠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장 미쉘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란 짧은 기간 동안 3천여점의 작품을 남겼다. 요절한 이후 더욱 명성을 얻고 있는 그는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가장 강력한 ‘젊음’의 아이콘이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덕에 바스키아는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한 언어를 표현하는 초석이 된다. 바스키아의 어머니는 뉴욕의 주요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며, 미술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게 했다.
8~9살 무렵,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 바스키아에게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인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선물했는데, 이 책은 이 후, 그의 작품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결합시키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
1977년부터 바스키아는 그의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개똥(SAMe Old Shit)’ 같다는 뜻의 ‘세이모(SAMO)’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하는 낙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물질만능주의와 권위적인 사회를 비판한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불거진 활동에 대한 입장차이로 알 디아즈와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집을 나와 노숙하며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당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 57과 머드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영화제작자, 음악가이자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를 만난다.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1980년 제니 홀저, 케니 샤프, 키키 스미스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즈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미국 화단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면서도, 어린아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작품 15점을 출품했다. 같은 해 바스키아는 스위스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를 만나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이후 아니나 노세이(Annina Nosei)의 지원으로 작업실을 얻게 된 바스키아는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미술가에서 미국 화단의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다. 같은 해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팔려나갔고, 유럽의 가장 권위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 Kassel Documenta 7》에 출품하며 바스키아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갔다.
초창기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그토록 바랐던 앤디 워홀(Andy Warhol) 과 만났다. 비쇼프버거의 권유로 워홀은 바스키아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바스키아 또한 워홀과 자신의 인물화를 그리게 된다. 이후 워홀은 바스키아가 자신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계의 별이 될 것임을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이 둘은 1984~85년까지 2년간 150여점이 넘는 작품들을 함께 만들며 다양한 실험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1985년 <워홀 바스키아 페인팅>전시가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면서 워홀과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고, 그는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으로의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마약 남용으로 유명을 달리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워홀이 제안하고 바스키아가 그린 사람들의 초상화가 담긴 세라믹 작품들도 볼 수 있다. 또한, 바스키아의 자유로운 작품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한 EXO찬열과 mq가 제작한 전시음악도 인상적이었는데, 이 전시음악은 바스키아가 작업하며 즐겨들은 음악 <볼레로>의 모티브에 콩고의 북소리, 바스키아가 속했던 밴드 그레이의 <I wanna Go Back>의 보컬이 삽입되어 있다.
장 미쉘 바스키아 - 거리, 영웅, 예술
Jean Michel Basquiat Royalty, Heroism and the Streets
2020. 10. 08 Thu - 2021.02. 20 Sat
전시기간 2020. 10. 8. ~ 2021. 2. 20.
전시장소 롯데뮤지엄
전시시간 10:30am ~ 8:00pm
관 람 료 성인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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