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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Ready/미술사

서양미술사 8. 사실주의(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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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격론이 오가는 사이 19세기 중엽 사실주의가 등장하는데, 사실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시대착오와 낭만주의의 도피주의를 비판했다. 동시대의 현실을 사회비판적인 관점에서 표현했으며, 사회의 여러 실상을 화가 자신이 본대로 그릴 것을 주장했으며, '현실을 보는 눈'이 이들의 공통관심사였다. 

 

 

 

특징

사실주의는 실상 서구미술의 항구적인 지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상화된 리얼리즘을 추구했고, 헬레니즘은 자연주의식 리얼리즘을 르네상스시대에는 얀 반 에이크처럼 사진처럼 정확히 묘사해 냈으며, 바로크 시대에도 페르메어, 벨라스케스 처럼 놀랍게 현실을 묘사했다. 그러나 19세기 이전에는 그들의 주제를 이상화하거나 극적으로 다룸으로써 어느 정도 수정을 가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19세기 사실주의는 시각적으로 인지된 것들만을 수정을 가하지 않고 그려냈으며 당시에 일어나 '동시대성'이 리얼리스트들의 구호였다.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과도 맥을 같이 하는데, 이들은 예술가가 무엇을 왜 그리는가?'에 대한 답을 사회적 현실에서 찾으려 했던 최초의 유파였다. 그러나 사회현실과 예술현실이 이원화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결국 이어서 등장한 인상주의를 더 빛나게 했다. 

 

 

 

주요 작가

① 쿠르베 (Jean-Désiré Gustave Courbet, 1819~1877)

쿠르베는 사실주의 운동의 아버지로 실용주의를 신봉했다. '회화는 구체적 예술이고, 실재 존재라는 사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6.7m의 커다란 캔버스에 시골장례식의 평범한 농부들을 소재로 사실적으로 묘사해 냈다. <내 화실의 내부>로 파리 부르주아 예술 관객의 엘리트 의식을 비판하며 사실주의 전시관을 열어 단독 전시회를 갖기도 했으며, 이러한 사실주의의 저항의지는 현대 예술에 매우 중요한 속성이 되기로 했다. <돌 깨는 사람>에서는 노동자 계층을 현실감 있게 그려냈으며, 그로테스크한 풍자 캐리커쳐 위주의 작품을 그렸다.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 캔버스에 유채, 315*668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쿠르베, <내 화실의 내부 The Painter's Studio>, 1855, 캔버스에 유채, 361*597cm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1849, 캔버스에 유채, 165*257cm, 베를린 국립회화관

 <돌 깨는 사람>은  2017년 미술사학의 문제로 출제되기도 했다. 

 

 

 

② 밀레 (Jean Franiois Millet, 1814~1875)

프랑스의 화가로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들 중 한 사람이다.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며, 데생과 동판화에도 뛰어난 많은 걸작품을 남겼다. '이삭줍기'와 같은 밀레의 작품은 사회주의자로부터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주의자로부터는 비판을 받았다.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50, 보스턴 미술 박물관

 

밀레는 빈센트 반 고흐의 초기 시절 작품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유명하다. 밀레와 그의 작품은 반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노르망디를 그린 클로드 모네의 작품들은 밀레의 풍경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또한 밀레의 작품들의 구도나 상징적인 요소 등은 쇠라의 작품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마크 트웨인의 연극 Is He Dead?(1898년작)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며 극에서 그는 명예와 부를 위해 그의 죽음을 가장하는 젊은 화가로 등장한다. 하지만 극에서 묘사되는 밀레는 대다수가 허구이다. 

 

밀레, <씨 뿌리는 사람>, 1865년경, 종이에 파스텔 또는 크레용, 43.5*53.5cm
고흐, <씨 뿌리는 사람>, 1888, 캔버스에 유화, 64*80.5cm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파리 오르세 미술관
밀레, <만종>, 1857~1859, 파리 오르세 미술관

 

 

<만종>은 19세기와 20세기에 자주 화가들에게 각색되어 그려지기도 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이 작품에 상당히 매료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작품을 분석하여 '밀레의 만종에 숨겨진 비극적인 신화'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달리는 이 작품을 정신적인 평화를 표현한 작품으로 보지 않고 이 작품이 어떠한 메시지와 억압되어 성적 호전성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다. 달리는 또한 작품 속의 두 명의 인물들이 삼종 기도를 올리는 게 아니라 땅에 묻힌 아이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달리의 끈덕진 주장 덕분에 이 작품은 그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X-레이 분석을 거쳐야 했다. X-레이 분석으로 알아본 결과 놀랍게도 이 작품은 최종 덧칠 전에 관과 비슷한 형태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 형태는 굉장히 불확실하여 정말로 관의 모양인지, 그리고 밀레가 마음을 바꾸어 만종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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