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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 Ready/미술사

서양미술사 9. 인상주의(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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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는 색채와 빛의 회화이다. 

1860년 초,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1886년을 기점으로 순수한 의미의 인상주의는 끝이 나지만 이후 모든 미술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미술사조이다. 인상주의는 르네상스 시대의 산물인 원근법, 균형잡힌 구도, 이상화된 인물, 명암대조법 등을 거부하는 등 미술전통에 혁신을 가져왔다. 그 대신 인상주의자들은 색채와 빛을 통하여 찰나의 시각적 감각을 표현하려 했다. 

 

 

배경

관학적인 화풍에 반대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마네를 중심으로 마네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실험하면서 인상주의 화풍을 탄생시켰고, 1874년부터 1866년까지 살롱전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7번의 전시회를 개최한다.

사물의 발명은 인상주의를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물감튜브가 발명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로 사용하였던 외광회화 즉, 밖에 나가서 그림 그리는 것을 수월하게 하였다. 

사진술의 발달은 회화의 사실주의적 재현이 애써서 현장을 똑같이 기록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했고,

이에 따라 회화만의 특징적인 것을 시도하려는 인상주의 양상이 힘을 얻게 된다.

 

 

특징

① 인상주의는 색채와 빛을 통해서 찰나의 시각적인 감각을 표현하려 하였는데, 이 때 어떠한 경험적인 선입견 없이 정말 순수하게 눈에 보이는 대로의 시각적 현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②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고 그것을 빠르게 그려내다 보니 그림이 굉장히 거칠 수밖에 없다는 특징이 있다.

분할필법이 이용되었으며, 선원근법, 균형 잡힌 구도, 인체 비례, 명암대조법(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색을 단계적으로 쓰는 방법),

입체감 등은 모두 거부하였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재현과도 거리가 멀다.

또 그 대상이 원래 가지고 있다고 믿는 색깔인 고유색은 상대적이고 조건적이고 가변적이라고 생각하였다.

 

③ 또한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려 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외광파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는 스케치는 현장에서 하더라도 스튜디오에서 스케치를 참고로 기억에 의존해서 그림을 완성하였다.

 

④ 근대생활의 기록 - 역사적인 혹은 교훈적인 주제, 이상과 신화의 세계를 추구하기 보다는 근대 생활의 단편이나 자연 풍경의 한 순간 등 동시대의 단면을 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의 후예라고 불린다. 특히 19세기 산업화와 함께 나타난 문화와 사회의 변화, 중산층의 일상을 소재로 많이 삼았다.

 

사실주의의 본래 의미는 단순히 자연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의 일상 생활을 주제로 삼는 것을 뜻한다. 이에 반해 자연주의는 단지 외형을 충실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동시대의 일상을 시쳐지나가듯하는 시선으로 담아내는 인상파에 대해서 보들레르는 '플라뇌르의 시선을 담아내는 사람들' 이라고 하였다. 즉, 인상파가 목적 없이 부유하는 산책하는 사람들의 시선처럼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빠르게 스쳐지나가는 시선으로 현대사회의 특징을 그림에 그대로 담는다는 뜻이다. 

 

정리하면, 인상주의 화파는 관학적 화풍을 반대하던 마네를 중심으로 시작한 새로운 화풍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관학적 화풍이 지향하던 원근감, 입체감, 고전적 주제를 탈피하고평면성, 근대적인 생활상을 그리는 주제 등을 특징으로 한다.

'찰나'를 포착하려는 것을 중시하며 그러다보니 색채와 붓질 명암이 거칠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가면 이러한 인상주의 작품 중 대작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 인상파 미술의 새로운 시도 ]

 

① 역사적이거나 문학적, 신화적, 상상적인 내용을 거부하고 화가의 눈으로 직접 대면한 현실의 대상을 그렸다.

 

② 색채를 중요시하여 팔레트에서 혼색을 피하고 색채분할법에 의해 원색을 짧은 선으로 화면에 찍어나감으로써 자연의 순수한 빛을 최대한 살리고자 했다. (다양한 색점이나 색선으로 그림)

 

③ 색채원근법을 거부 - 먼 곳에도 따뜻한 색을 쓰고, 가까운 곳을 칠할 때도 차가운 색을 과감하게 사용했기 때문에 색채로 뒤덮인 평면이 되곤 했다. 피사로가 그린 <들의 여인>, 모네가 그린 <에프트 강가의 포플러>등은 대표적인 예다.

 

④ 사물의 고유한 물질성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화면 전체를 동일한 안료의 물질성으로 채우고 있다. (물을 그릴 땐 물과 같은 재질감, 바위를 그릴 땐 육중한 중량감과 우툴두툴한 표면 재질감 내는 것을 거부하고 화면을 생동하는 거칠고 빠른 붓 터치로 채웠다.)

 

⑤ 그늘이나 그림자 부분을 칠할 때 검은색 계통을 쓰지 않고 푸른색이나 보라색 계통의 유채색을 썼다.

 

⑥ 대상의 세부적인 묘사를 거부했다.

  

 

* 인상주의 미술은 미술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혁명적 사고의 전환을 보여준다. 즉, 미술은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서나 종교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묘사하기 위해서 존재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미술 그 자체의 순수 조형적 가치 때문에 존재 의의를 지니는 것이라고 중요한 사고의 전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그림의 주제가 중요했던 것이 아니라, 빛과 색채가 그림 속에서 지니는 풍부한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인상주의 미술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19세기의 사진술의 발전은 자연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매우 용이하게 함으로써, 미술로 하여금 종래와 같은 자연 모사가 아닌 다른 길을 탐색하도록 자극을 주었다.

 

 

주요 작가

 

① 마네 (Eduard Manet, 1832~1983)

근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린다. 마네의 작품이 대중의 분노를 샀으나 그가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은 이유는 바로 위대한 회화의 전통을 근대적으로 바꿔 표현한 그의 방식 때문이었다. 마네는 이상화된 신화의 허상을 벗기고 그것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솔직하게 묘사하였다. 세밀하게 세부를 처리하던 전통적인 기법을 최소화하였고 스케치와 같은 그의 화필은 그의 작품을 마치 미완성인 듯 보이게 했고 화면을 평면적이고 딱딱하게 만들었다.

 

마네, <풀밭 위의 점심>, 1863, 캔버스에 유화, 208*264.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누드를 이상화하여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외설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녀의 근대적인 외양과 직접적인 시선은 고대의 여신상을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에 스캔들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명암법을 어기고 색채로 평평한 부분을 강조한 마네의 기법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마네,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화, 130.5*190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뻔뻔스럽게 관객을 쳐다보는 주인공 매춘부의 눈초리와 개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마네, <폴리베르제르 술집>, 1882, 유성페인트, 96*130cm, 런던 코돌트 미술 연구원(The Courtauld Gallery)

찰나의 빛과 색채를 묘사하는 인상주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② 모네 (Claude Monet, 1840~1926)

빛은 곧 색채이다. 색조를 달리해가며 덧칠하는 전통적인 기법대신 그는 다른 색깔들을 나란히 배열하여 진동하는 듯한 효과를 주고 있다. ‘시각적 혼합’방법을 통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혼합되어 보인다.

 

<루앙 대성당 시리즈>는 태양의 위치에 따른 색채의 변화를 표현한 것으로 모네는 색 자체를 그려냈다. 

 

모네, <수련시리즈>, 1900~1926년

작은 반점을 사용하는 대신 화필을 늘여서 구불구불한 필치 사용. 윤곽선이 없이 형태와 선이 붓 자국으로 뒤섞이도록 하고 있고, 원근법이나 실제적인 이미지가 뚜렷하지 않아 거의 추상에 가까운 이 그림의 주제는 빛 속에서 모네가 본 색채 그 자체다.

 

 

 

③ 르느와르 (Renoir, 1841~1919)

“그림이란 즐겁고 유쾌하고 예쁜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는 이미 불유쾌한 것이 너무 많은데 또 다른 불유쾌한 것을 만들어낼 필요가 어디 있는가!”

인상주의 작품이 굉장히 성공을 거두게 되었으나 르누아르는 그 화풍에 만족하지 않고 고전적인 포주의 누드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의 누드화의 주요 색조는 붉은 색으로서 그는 건강한 살결의 색을 표현하는데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르느와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춤>, 1876, 캔버스에 유채, 131*175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일상의 유쾌한 순간과 그 속의 인간들의 모습을 빛과 색채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다. 당시의 대중적인 야외 술집이었는데 인생의 즐거움이 넘치고 있다. 윤곽선 없이 하이라이트와 얼룩진 빛으로 제시된 형태와 검은색의 사용을 거부(검은색 대신 짙은 푸른색으로 그렸다.)한 점은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표현이다. 

 

 

 

④ 드가 (Degar, 1834~1917)

야외에서 그림 그리기를 싫어했으나 인상주의자들과 (교분이나 동시대 주제를 다룬 점) 관학적인 화풍에 반대한 점 때문에 이 그룹의 중요한 멤버로 기록되고 있다. 드가는 모네, 마네, 르누아르와 어울렸으며 주요 관심사는 순간에 표착된 무계획적이고 순간적인 광경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경마장, 서커스, 오페라, 카페풍경, 여인의 일하는 모습,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발레리나를 주로 그렸으며, 3차원적인 깊이와 견고한 윤곽선을 강조하고 구성과 사상법을 중시하였다.

 

* 발레 그림 : 한 순간에 멈춰선 인물들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며 인물 군을 중심에서 벗어나게 위치시키거나 때로 그림틀 바깥으로 잘려 나간 것처럼 묘사하는 구성법은 대담하였다. 파스텔이나 유화물감을 이용하여 그렸다. 드가는 최초로 파스텔화를 완성작으로 전시했으며 수많은 작품을 제작한 유일한 화가이다.

 

* 조각 작품 : 거의 장님이 된 말년의 드가는 자신의 촉각에 의지하여 무용수나 밀랍 모형을 만들었다.

 

 

 

⑤ 로댕 (A. Rodin, 1840~1917)

고전주의의 이상화하는 조각의 전통을 버리고 사실적인 요소를 조각예술에 도입했다. 로댕은 인체의 움직임을 통해 내면의 감정을 표현 하려고 하였다.

단테의 「신곡」을 작품화 하였으며  <생각하는 사람> <키스>같은 200개가 넘는 등신대, 조각상을 만들었다. 인물들의 인체의 표현력이 최대한 강조되어 고양된 감정으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로댕, <청동시대>, 1876, 미니애폴리스 미술원

매우 사실적이라서 인체로 주물을 떴다고 비난 받았다.

 

 

로댕, <키스>, 1886, 로댕갤러리

최초의 현대조각가이며 조각상들의 고동치는 에너지와 형태는 20세기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로댕, <지옥의 문>, 1880, 로댕 갤러리

 

 

 

* 우키요예 : 1860년 프랑스에 처음 수입된 일본의 채색 목탄화이며 유럽 미술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판화에 나타난 일상생활을 보는 비전형적인 시각들은 인상주의자들이 근대 생활을 그림의 주제로 샀는데 영향을 주었다. 평면적이고 밝은 채색법, 윤곽이 분명한 형체, 표면적이고 때때로 대조적인 선적 문양 등을 모방하였다. 특이한 시점, 원근법이 결여된 점, 중앙을 벗어난 구도, 잘린 듯한 인물 표현, 경사진 선의 사용도 일본 판화에 배운 것이다.

 

카츠시카 호쿠사이, <카나가와의 파도 아래>, 1823~29

 


 

 

인상주의는 신 인상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신인상주의는 인상주의 이론을 과학적 분석적으로 체계화하여 색채를 원색의 작은 색점으로 병치 혼합하여 캔버스 표현에 낱알 부스러기 같이 반짝이는 효과를 주었다. 

 

※ 점묘법 (Pointillism)

신인상주의의 점묘법은 인상주의의 채색 기법을 기반으로 하기는 했기에 인상주의에서 모네와 르누아르가 체계적으로 사용했던 점묘주의와 같은 기법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신인상주의는 더욱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점묘로 발전, 구별시키며 '분할주의'라는 용어를 선택 사용하였다. 

물리학자 루드의 <근대색채학> 화학자 슈브뢸의 <색채의 동시 대조 법칙>을 읽으며 과학에 근거한 색채 이론을 연구하였다. 혼합의 원리, 보색효과를 분석하여 과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주요 작가

쇠라 (Georges Seurat, 1859~1891) ; 점묘화가

 

쇠라,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4~1886, 시카고미술원
쇠라, <서커스>, 1891, 185*152cm, 파리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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